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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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기도] 2월 3일 입춘기도 회향
종범스님 2021-02-03
<세속입춘 발심입춘> 오늘 입춘 법문은 처음 하는 거 같아요. 입춘 법문 한 기억이 없어요. 근데 오늘 입춘 법문 제목이 <세속입춘 발심입춘>. 이런 제목으로 법문을 하겠습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이렇게 다 써 붙여요. 그런데 이게 뭐냐. 동북아시아 우주관, 동북아시아 생활습속 이런 거예요. 입춘대길이다, 건양다경이다 하는 의미를 찾아보면요, 立春大吉 立字 莅義也 吉字 福義也 입춘대길 입자 이의야 길자 복의야建陽多慶 建字 至義也 慶字 福義也 건양다경 건자 지의야 경자 복의야 입(立)자는 임할 이(莅)자와 같은 뜻이다. 초 두 밑에 지위 위자가 있는데 그게 임할 이자에요. 임이라는 것은 온다는 뜻이에요. 시작이 아니라 온다. 봄이 온다. 봄이 임했다. 대길(大吉)이란 자전에 찾아보면 길은 복(福)야라, 길한 건 복된 거예요. 복된 건 다 길한 거예요, 다 좋은 거예요. 그래서 <봄이 오십니다, 큰 복으로 오십시오.> 이렇게 염원하고 이렇게 행사하는 게 입춘 염원, 입춘 행사입니다. 봄이 오는 거예요. 그런데 봄만 오는 게 아니라 복과 함께 온다. 큰 복으로 오십시오. 건양다경이라고 하는데, 건(建)자는 그 용례가 건은 지야라(建字 至義也), 이를 지자, 건이라는 것은 이른다는 소리예요, 역시. 양이라는 것은 동지부터 하지가 양인데, 양절기, 양의 절기가 오신다. 다경(多慶)인데, 많을 다자는 많다는 의미고, 경사 경자도 경사는 역시 복이에요. 그래서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경은 복야라(慶字 福義也). 복 돼야 경사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길할 길자 두 번 쓰면 재미없잖아요. 양절기가 다가옵니다. 큰, 많은 복으로 오십시오. 立春之日 東風解凍 迎春迎福 古今同事 입춘지일 동풍해동 영춘영복 고금동사 그렇게 해서 입춘날이 오면 어떻게 되냐. 동풍이 해동을 하니, 동쪽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는데 얼음을 다 녹여요. 해동을 해요. 그러니까 영춘영복(迎春迎福)이라, 봄도 맞이하고 복도 맞이한다. 옛날에 동아시아에서는 국가마다 영춘각이 있고 영춘대가 있어요. 영춘각, 그 집에 가서 봄맞이를 하는 거예요. 왕과 신하들이 나가서. 영춘대가 있어요. 어느 장소에 가서 영춘행사를 하는데, 왜 봄을 맞이하는가. 복이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봄은 복을 가지고 온다. 그래서 영춘은 영복이다. 이는 고금이 동사라(古今同事), 옛날이나 지금이나 봄맞이, 복맞이는 다 사람들이 원하는 세속적인 일이거든요.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滿家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寒來暑往 秋收冬藏 禍因積惡 福緣善慶 한래서왕 추수동장 화인적악 복연선경天地玄黄 宇宙洪黃 천지현황 우주홍황四方上下曰 宇 古往今來曰 宙 天地也 사방상하왈 우 고왕금래왈 주 천지지 그런데 하나 재밌는 일이 있어요. 양무제 때, 양무제가 명을 해서 천자문을 짓게 했는데, 그 천자문 구조가 사언(四言) 한시 이백오십구(句) 천자문이에요. 네 가지 말로 된 한시인데, 구가 250구, 그러면 총 합해서 천자인데, 거기에는 봄 춘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천자문에. 천자문에 봄 춘자가 없어요. 희안해요. 그러면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게 한래서왕(寒來暑往)부터 시작을 해요. 찬 것이 오면 더운 것이 간다. 그래서 오는 건 보이는데 가는 건 안 보여요. 그래서 동아시아 인식 방법으로 하면 왕래보다 내왕이 맞는 거예요. 봄이 오니까 겨울은 가잖아요. 찬 것이 오니까 더운 것이 가잖아요. 이게 한래서왕이거든. 추수동장(秋收冬藏),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감추고. 이 동아시아인들은 추수동장을 굉장히 중시했다는 거예요. 가을에 거둬서 겨울에 잘 간직하는 것을. 인생도 가을걷이가 있고 겨울저장이 있는데 이걸 잘해야 돼요. 그 한참 재밌어요. 그리고 복을 빌 때 옛날에는 기둥에다 많이 붙이는데, 빠짐없이 붙이는 입춘 시가 있는데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에요. 하늘은 세월을 더하니까 사람은 수명을 더하게 하고, 하늘은 세월을 계속 증장시키니까 사람은 수명을 계속 증장시키게 하고. 춘만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 건곤에, 하늘과 땅에 봄이 가득하니 집안에는 복이 가득하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는 날마다 붙이는 입춘맞이 행사, 염원이에요. 그런데 천자문에는 복은 간데없고 추운 것이 오면 더운 것은 가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저장한다. 이런 계절 이야기가 나오고, 조금 넘어가다 보면 참 재밌어요. 복과 반대되는 게 화인데, 화를 부른다고 하잖아요, 재앙 화. 화인적악(禍因積惡)이요, 화는 악을 쌓는데서 생기고, 복연선경(福緣善慶)이라, 복은 착하고 아름다운 데서 생긴다. 거기 인연이란 말이 나오죠. 불교가 중국에 온 지 한참 됐기 때문에 화인적악 복연선경은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시구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천자문에는 <극념작성(克念作聖)하고, 망령과 정념이 있는데 망령을 이기면 성인이 되고, 덕건명립(德建名立)야, 덕을 세우면 이름이 선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중국인들도 봄에 의지해서 무조건 복만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이 복이 어디서 오느냐, 이름을 세우려면 덕을 세워야 된다, 사람이 품격이 높아지려면 극념을 해야 된다, 이길 극, 생각 념. 자기 헛된 생각을 이겨야 성스러워질 수가 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봄맞이 행사는 그렇게 수신, 작복이 아니라, 새해를 맞이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국가행사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해동하는 입춘일에 <봄맞이 복맞이, 봄과 함께 큰 복으로 오십시오.> 이렇게 되는데, 동아시아 12개월 계절관을 보면 봄을 아주 중시하는데, 봄이 언제부터 시작돼서 언제 끝나나. 동지부터 시작된다고 봐요. 동지에서 양절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하지에서 끝나는 게 양절기의 끝으로 봐요. 동지에서 청명까지가 봄의 절정인데 그게 105일이에요. 그래서 조사어록에 보면, 질문을 해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질문을 하면 “동지에서 청명까지가 105일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동짓날부터 청명, 4월 첫째 계절이 청명이거든요, 그 다음이 곡우고. 양력으로 5월 첫째 계절은 벌써 입하에요. 여름이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곡우가 되면 만춘 만절(晩春 晩節)이라고 봄이 끝나가는 거예요. 그 다음 여름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곡식 곡, 비 우(穀雨), 곡우 직전 계절이 청명인데 그 청명이 봄의 절정이에요. 그래서 항상 동지에서 청명까지는 봄맞이를 잘해서 만복이 다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을이 되면 이것을 잘 거둬서 저장하고. 이게 동아시아 우주관이에요. 동아시아 우주관은 천지, 음양, 여기에 잘 순응해야 산다는 우주관이에요, 천지, 음양. 그걸 순천(順天)이라고 해요. 천이란 천지음양이란 말이거든요. 순은 거기에 순응해야 된다. 천지음양의 순응하지 않는 걸 역천(逆天)이라고 해요, 거스를 역자. 그래서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생존할 수 있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이라, 죽는다.> 이거거든요. 이런 우주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천지는 현황하고(天地玄黄), 현은 붉을 현자인데, 하늘 색을 말해요, 천현(天玄). 하늘은 붉다, 끝이 없다 그거죠. 지황(地黃), 땅은 누르다. 이거 전부 빛깔을 말하는데, 하늘색은 붉고 땅색은 누르다. 이 말은 천지는 광대해서, 넓고 커서 끝이 없다 이 소리예요. 우주도 마찬가지인데, 우주도 천지인데, 우주를 어떻게 설명했나 하면, 자전에 보면 사방상하왈(四方上下曰) 우(宇)요, 사방상하가 우요, 고왕금래왈(古往今來曰) 주(宙)라, 옛것은 가고 지금 것은 오는 것을 주라고 한다. 이렇게 해석을 해요. 그래서 우주도 역시 천지인데, 천지도 천지고 우주도 천지인데, 이 전부 자연이잖아요. 그런데 우주엔 뭐가 보이냐 하면 홍황이라(宇宙洪黃), 홍은 물이에요. 많고 많은 물이 보인다. 황은 풀 초가 위에 들어갔는데, 풀과 나무가 끝이 없이 우거져있다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풀과 나무를 거스르면 안 되고, 물을 거스르면 안 되고, 하늘과 땅의 음양기운을 거스르면 안 된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이게 동아시아의 우주관이에요. 그런데 불교는 아니에요. 왜 아니냐. 일체가 유심(一切唯心)이에요. 천지현황 우주홍황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일체가 유심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래서 하늘도 유심하늘이에요. 마음의 하늘이에요. 땅도 마음의 땅이고, 물도 마음의 물이에요. 풀과 나무도 마음의 풀과 나무거든요. 전혀 틀린 거예요. 유심소현(唯心所現)하고 천지현황하고는 전혀 틀린 거예요. 이게 불교예요. 그래서 마음으로 떡 돌아가서 천지 우주를 보면 어느 날이나 다 좋은 날이고, 어느 날이나 다 극락일이고, 어느 날이나 다 길경(吉慶), 복되고 복된 날이에요. 입춘날만 봄이고 가을은 가을이고 그게 아니에요.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춘유백화추유월이요 하유양풍동유설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寒山詩) 약무한사가 괘심두하면 변시인간호시절이라 (한산시) 그래서 한산시가 있는데, 한산시에 보면, 춘유백화추유월이요(春有百花秋有月), 봄에는 백화가 있고, 백 가지 꽃, 온갖 꽃이 있고, 가을에는 시원한 가을 달빛이 있고, 하유양풍동유설(夏有凉風冬有雪)이라, 여름에는 가끔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있는데, 그 여름에 맞보는 선들바람 참 기가 막혀요. 여름에 더운 것만 있는 거 같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어요. 또 겨울에는 눈이 있다. 약무한사가 괘심두하면(若無閑事掛心頭), 한사라면 한가할 한자, 일 사자인데, 쓸데없는 일이에요. 쓸데없는 일이 마음속에 걸려있지 않으면 그냥 사시사철 꽃도 있고, 바람도 있고, 달빛도 있고 눈도 있고 다 좋은데, 쓸데없는 망상 집착이 떡 걸려 가지고, 마음속에 걸려있어서 그 망상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거지, 천지우주에는 괴로움이 하나도 없다. 다 유심소현이다 이거죠. 다 마음에 나타난 바다. 이게 불교에요. 천지홍황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유심소현, 유심천지를 말하는 게 불교다. 마음이 하늘 땅이다.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라, 호시절 아닌 때가 없는 게 불교에요. 여름도 좋은 시절이고, 겨울도 좋은 시절이고.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 不問汝 十五日已後 운문수어운 십오일이전 불문녀 십오일이후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碧巖錄 第六)도장일구래 자대운 일일시호일(벽암록 제6) 그래서 벽암록 100칙이 있는데, 벽암록 제6칙에는 일일이 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나날이 좋은 날이다. 이런 법문이 있어요. 운문선사가 법문을 할 때, “15일 이전에는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 해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스스로 말하기를 “일일시호일이라”, 나날이 좋은 날이라. 15일 이전이나 15일 이후나 맨날 좋은 날이란 거예요. 세월에 따라서 오고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세월에 자재를 해요. 그래서 선사들한테 “시간이 뭡니까?” “내가 깨닫기 전에는 내가 시간을 따라갔는데, 내가 깨달은 후에는 시간을 끌고 간다.” 그래요. 내가 시간을 끌고 가. 시간에 자재하는 거예요. 시간에 얽매이면 내가 시간을 쫓아가는 거예요. 이게 불교에요. 그래서 내가 입춘을 끌고 가지 내가 입춘에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불교는. 이런 차이가 있어요. 불교의 우주관하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동아시아 우주관하고는 틀린 거예요. 聞風吹殿鈴聲 尊者問師曰 鈴鳴耶風鳴耶 師曰 문풍취전령성이라 존자문사왈 영명야풍명야 사왈非風非鈴 我心鳴耳 心復誰乎 師曰 俱寂靜故 비풍비령 아심명이 심부수호 사왈 구적정고(傳燈錄 第17祖僧伽難提 第18租伽耶舍多 問答)(전등록 제17조승가난제 제18조가야사다 문답) 그리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이 있는데, 거기 33조 조사에 대해서 말씀이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33조 중에 제 17조 승가난제 조사와 제18조 가야사다 존자, 스승과 제자가 문답을 하는데, 문풍취전령성(聞風吹殿鈴聲)이라, 바람이 법당에 매달려 있는 풍경에 불어서, 풍경을 뒤흔들어서 풍경소리가 쩌렁쩌렁 난 거예요. 풍취전령이라, 바람이 불어서 소리가 났어. 풍경소리가 쩌렁쩌렁 나니까 17조 승가난제 존자가 제18조 가야사다 존자에게 물었어요. 뭐라고 물었느냐. “영명야풍명야(鈴鳴耶風鳴耶), 지금 풍경에 소리가 났는데 풍경에서 나는 소리냐 바람에서 나는 소리냐.” 울릴 명자인데, 풍경이 울리는 것이냐 바람이 울리는 것이냐, 이렇게 물었거든. 이 말이 육조단경에도 그대로 있어요. 바람에 깃발이 날리니까 그게 번동(幡動)이냐 풍동(風動)이냐, 깃발이 움직이는거냐 바람이 움직이는 거냐 이렇게 물었거든요. 그 다음 얘긴 다 알 거 아니에요. 육조단경에서 뭐라고 그래요? (대중스님 : 마음이 움직인다) 맞아요, 그거에요. 비풍비번(非風非幡)이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인자심동(仁者心動)이라, 인자는 그대라는 말인데, 어질 인자,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거다. 이게 불교에요. 마음이 없이 바람이 없어요. 바람이 있기 전에 먼저 마음이 있는 거예요. 또 바람이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제일 뒤에까지 있는 게 마음이에요. 그 말이 제17조, 제 18조 문답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풍경이 움직이는 거냐, 바람이 움직이는 거냐. 그러니까 가야사다 제18조 존자가 대답을 하기를 “비풍비령(非風非鈴)이다, 바람이 울리는 것도 아니고, 풍경이 울리는 것도 아니고 아심명이(我心鳴耳)라, 나의 마음이 울리는 것이다. 아심명이라.” 그러니까 또 물었어요. “심부수호(心復誰乎)아, 그럼 마음은 또 뭐냐.” 마음은 누구냐 하는데 무엇이냐고 했어요. 그러니까 대답을 하는데, 세 마디로 대답을 하는데, 함께 구, 고요 적, 고요 정, “구적정(俱寂靜), 마음은 구적정이라.” 마음에는 바람도 없고 풍경도 없고 나도 없고 당신도 없고.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고. 다 고요해요. 그런데 인연 따라서 풍경소리도 나고 바람소리도 나고, 스승도 있고 제자도 있고, 이게 마음이에요. 무명무상(無名無相)인데 수연성취(隨緣成就)한 거예요. 인연 따라서 성취하는. 이걸 깨닫기 전에는 몰라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데 수연 성취, 인연따라 성취를 해요. 그래서 이 마음은 직접 봐야되는 거예요. 그래서 견성(見性)이라고 해요. 구적정이라, 구적정인데, 모두가 고요하고 고요한데, 그럼 지금 풍경소리도 듣고 바람소리도 듣고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했는데 이건 뭐냐 이거요. 이게 수연성취거든요. 인연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들. 근데 그 근본은 없어, 고요해, 무일물(無一物)이야. 그래서 이걸 스승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기가 눈을 뜨기 전에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깨달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신회, 육조스님 제자 신회선사는 뭐라고 설명했냐. 허공에다 비유를 했는데, 허공이라는 게 참 재미있는 게 햇빛이 올 때는 전체가 밝은 것뿐이에요. 또 해가 사라지면 전부가 어두운 것뿐이에요. 사람이 나타날 때는 그대로 사람이요, 동물이 나타날 때는 그대로 동물이고, 산이 있을 때는 그대로 산뿐이고, 바다가 있을 때는 그대로 바다일 뿐이지. 근데 허공은 또 항상 허공일 뿐이에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게 선악은 별배지(善惡 別配之)라, 선과 악은 따로따로 배정이 돼서, 선할 때는 그렇게 선할 수가 없고 악할 때는 그렇게 악할 수가 없어요. 이게 수연성취에요. 그런데 이 마음은 선도 적정하고 악도 적정해. 구적정이에요. 모두가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이걸 깨닫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이 내용이. 그러니까 “내가 법을 전할 때 네가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리요”, 그래서 전법계가 이루어지는 게 전등록에 나오거든요. 이게 마음이에요. 생멸이 적멸이라고 아무리 죽고 살고 해도 그건 수연성취고, 적멸은 구정적인 거에요, 함께 고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깨달음을 떡 얻고 나면 다 호시절이에요. 좋은 시절. 태어날 때도 좋은 시절이요, 이 몸이 죽을 때도 좋은 시절. 사는 걸 좋아하고 죽는 걸 싫어하는 것은 망상 집착이에요. 이게 불교에요. 말만 들어도 좋긴 하다.(웃음) 천지는 현황하고 우주는 홍황하니, 한래서왕하니 추수동장, 이런 거와는 차원이 틀린 거예요. 거기는 순응하라는 걸 가르치지만, 여기는 자재하라는 걸 가르쳐요, 해탈이거든. 천지에 해탈자재를 가르치는 게 불교고 저쪽에서는 천지만물에 순응생존하는 걸 가르쳐요. 순응해서 살아남아라. 불교가 동아시아에 있으니 동아시아 문화를 거역할 수가 없잖아요. 수연성취니까. 그래서 세속적인 입춘이다. 不能了自心 云何知正道 불능요자심하면 운하지정도요彼由顚倒慧 增長一切惡 (華嚴經 須彌偈品)피유전도혜하야 증장일체악이라 (화엄경 수미게품) 그러니까 불교의 진정한 입춘은 뭐냐. 마음을 알아서 마음을 이루는 게 입춘인데,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에 보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정도(正道), 바를 정, 길 도, 바른길이란 것은 그 구적정 수연성(隨緣成)하는 마음 도리가 정도다. 모두가 고요하지만 수연성한다. 이게 마음인데, 구적정, 수연성,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능요자심하면(不能了自心), 자심을 알지 못하면, 운하지정도(云何知正道)리요, 어떻게 정도를 알리요. 마음이 정도다. 천지음양 입춘을 가르치는 데 아니에요. 동아시아인들은 천지음양을 굉장히 중시했어요. 그걸 계절만 봐도 알 수가 있어요. 사입(四入) 이분이지(二分二至)인데, 입이 네 가지에요.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다가온다는 얘기에요. 다가올 때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분이 두 가지에요. 그건 한복판에 왔다는 이야기거든요, 분은. 춘분, 추분. 이제 정점에 이르렀다, 지가 두가지에요, 하지, 동지. 이걸 다 가르치는 거예요. 이걸 굉장히 중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순응생존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해탈자재, 마음으로 돌아가서 계절과 천지만물에 자재하는 것이 불교다. 이거거든요. 정도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불능요자심하면 운하지정도요(不能了自心 云何知正道), 자심 , 자기마음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정도를 알리요, 그래서 피유전도혜(彼由顚倒慧)하야. 저들이, 중생들이 전도된 지혜로 말미암아서, 전도된 지혜라는 게 뭔가. 일체 사물이 자기마음의 소현인데, 일체가 유심조, 자심소현인데, 자심이 나타난 것인데, 자기 마음 밖에 사물이 있는 줄 알고 쫓아간다 그거죠, 그게 전도에요. 내가 그림을 그렸는데 자기가 그린 그림을 자기가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해서 취사집착을 한다, 취하고 버리고. 좋은 그림도 내가 그린 거고 나쁜 그림도 내가 그린 건데요. 자기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싫어해서 스스로 얽히고 매이고, 그걸 속박이라고 해요. 그래서 자심소현을 스스로 모르고 스스로 속박을 당해서 고통을 겪으니 그걸 전도혜라고 한다, 전도된 지혜라고 한다. 그래서 전도혜가 되면 어떻게 되냐. 증장일체악(增長一切惡)이라. 모든 악이 전도된 지혜에서 나와. 전도몽상에서 일체악이 나온다. 日日發心 立春大吉 일일발심이 입춘대길이요常修福慧 建陽多慶상수복혜는 건양다경이다 그래서 불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일일발심(日日發心)은, 나날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발심은 입춘대길이 되고, 일일발심이 입춘대길이요, 상수복혜(常修福慧)는, 항상 상, 닦을 수, 복 복, 지혜 혜, 이 복혜를 닦는 건 닦는 날이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니라 상수, 항상 닦는다. 복과 지혜를 항상 닦는 것, 상수복혜는 건양다경이다. 오늘 법문 마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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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2월 1일 영가 100재 법문
종범스님 2021-02-01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이 무상하니 시는 생멸법이로다 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멸이하면 적멸이 위락이로다나무아미타불(涅槃經 聖行品)(열반경 성행품) 涅槃經 聖行品(열반경 성행품)에서, 제행이 무상(諸行無常)하니, 제법이 삼세를 흐르면서 항상 하는 것이 없으니, 시는 생멸법(是生滅法)이다, 이것은 나고 죽는 법이다. 생멸이 멸이(生滅滅已)하면, 나고 죽는 법이 없어지면, 적멸이 위락(寂滅爲樂)이라,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법, 적멸법이 즐거움이 된다. 열반경에서 하신 말씀인데요. 생멸과 적멸, 생멸은 생로병사고 적멸은 불생불멸인데, 생로병사가 없어지면 불생불멸이 즐거움이 된다. 이 말씀인데요. 생로병사 생멸법이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가.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견상(見相), 볼 견자, 형상 상자, 견상하면 생멸이고, 볼 관자, 성품 성자, 관성(觀性)하면 적멸이다. 견상의 생멸이요, 관성의 적멸이다. 왜 그러냐. 상에는 집상(執相)이 있고 자상(自相)이 있는데, 일체중생이 태어나서 평생 보고 듣는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상밖에 볼 수 없다는 거죠, 모일 집자, 상이라는 상자, 집상. 전부가 집상이에요. 모여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면 일체사물의 자상, 자체 모습, 그것은 생멸이 아니고 적멸이다. 그것은 불생불멸이다. 하늘과 땅도 전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생로병사도 전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흥망성쇠도 다 모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모이기 전에 자상, 자기 모습, 모인 후에 자상, 자기 모습은 적멸이다, 적멸. 근데 본분은 견상에 주상(住相)을 하고 모여서 이루어진 집상을 보고 거기에 머문다, 주상. 그래서 제법이 생멸이 되고, 삼세제불은 어상에 관성이라, 모든 집상에서 자체 자성 자상을 본다. 상에서 상을 보는 게 아니라 상에서 성을 본다 이거죠. 그래서 해탈자재(解脫自在)가 돼요. 그 해탈자재가 극락세계에요. 하늘을 봐도 하늘의 모양을 보는 게 아니라, 견상을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자체상을 본다. 관성을 한다는 거죠. 상에서 성을 본다. 어상에, 어조사 어자가 있는데, 일체 상에서 관성을 하면 해탈자재가 되고, 견상에 주상을 하면, 상을 보고 상에 머물면 생로병사가 된다. 그래서 상에서 성을 보면 생로병사가 없어져요. 그게 생멸이 없어지면 이 소리예요. 언제 나의 생사가 끝나나, 어상에 관성을 하면, 상에서 사물의 자성을 보면 –자성은 자상인데- 없어져요. 생멸은 없어요. 얼음에서 물을 보는 순간에 얼음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얼음에 자재하는 거예요. 얼음이 얼든지 안 얼든지. 물에 돌아가서 자재하니까 아무 속박과 고뇌가 없다 이거죠. 속박 고뇌 없는 적멸세계를 불생불멸 극락세계라고 한다 이거에요. 世間種種事 如露亦如電 세간종종사가 여로역여전이니照見如如相 頓成圓成人 조견여여상하면 돈성원성인이로다一切咸靈類 法性摠持身 일체함영류가 법성총지신이니無垢圓淨光 任照常無痕무구원정광이 임조상무흔이로다나무아미타불 형상이 생기고 형상이 사라지는 것이 세간인데 세간의 온갖 일들이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금방 생겨났다 금방 사라진다, 그 말씀이죠. 거기서 집상, 생멸, 이런 거 말고 여여상, 자상, 자성, 그 여여상을 조견이라, 보면(照見如如相), 돈성원성인(頓成圓成人)이라, 원만히 이루어지는 극락세계 자재인을 바로 이룬다. 돈성이란 지체없이 바로 이룬다, 이런 소리예요. 일체함영류(一切咸靈類)가 일체중생이 법성총지신(法性摠持身)이라, 일체법에 자성이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는 그런 총지의 몸이다. 무구원정광(無垢圓淨光)이, 아무것도 섞인 게 없는 자상광명, 만법자성의 광명이 임조(任照)라, 임의로 비친다, 바다에 그림자가 비추듯이. 애써서 비추는 게 아니라 저절로 항상 비춘다. 그런데 아무 흠집도 없다. 이 말은 내가 언어 속에서 하는 말이 전부가 의식분별의 작용이에요. 태어났다 하지만은 자상에는 태어난 게 없고. 이 죽는다는 것도 전부 집상분별이에요, 상에 집착하는 분별이다. 허공에는 죽음이 없거든요. 처음이니 끝이니 구경이니 전부가 생각으로, 생각하는 거지 만법자성에는 처음이 없어요. 내가 태어난 날이 절대 처음이 아니고 내가 죽는 날이 절대로 마지막이 아니에요.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그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에요. 생각으로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예요. 극락세계는 그런 거예요, 처음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고, 난 것이 난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게 적멸, 상락(常樂), 항상 상자, 즐거울 락자, 생사 없이 항상 즐겁다. 적멸, 상락 그게 여여 자성, 늘 같아요. 그게 자성인데 여여자성이 적멸상락이라, 생사 없이 항상 즐겁다. 그 세계로 가시라는 거예요. 세간종종사는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아서 거기에 머물 데가 못돼요. 10년 머물다 사라지고, 20년 머물다 사라지고, 100년 머물다 사라지고. 100년이 순간이니까 금방 사라져요. 그러니까 적멸상락 극락세계로 잘 가십시오. 세상에 미련이 많아서 못 가면 할 수 없고. 본인이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고. 세상 경험을 크게 한 사람일수록 세상의 진실을 알아요. 세상 경험을 크게 한 사람일수록 세상에 매이지 않아요. 眞性自相 實相光明 진성자상 실상광명이無苦有樂 名爲極樂무고유락하니 명위극락이로다나무아미타불 진성자상(眞性自相)은 허공과 같은 것도 있고, 상락아정(常樂我淨)도 있고, 이 두 가지가 겸해서, 이건 깨닫기 전에는 몰라요. 허공은 불생불멸은 맞는데 상락아정이 없어요. 항상 즐겁고. 자체아, 집생아가 아니고 모여서 태어난 자아가 아니고 자체아, 또 상청정. 그래서 이게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이 겸해있는 거라. 깨닫기 전에는 도저히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로 허공을 들지만 허공은 상락아정을 거기서 표현할 수가 없거든요. 상락아정을 얘기하다 보면 허공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극락세계는 태허공과 같은 불생불멸과 늘 희로애락과 같은 상락아정이 있다. 겸해있어서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거죠. 불성은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이 겸해있는 걸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이라고 해요. 그럼 진성자상(眞性自相)의 실상광명(實相光明)이 무고유락(無苦有樂)하니 고통은 없고 즐거움만 있으니, 명위극락(名爲極樂)이라, 이름을 극락이라 한다. 不生不滅 壽光無量 불생불멸이며 수광이 무량하며 常樂我淨 極樂世界상락아정이니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고, 무량수 무량광 수명이 한량이 없고 광명이 한량이 없어서, 수광이 무량하다. 불생불멸이며 수광이 무량하며 (不生不滅 壽光無量)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 항상 즐겁고 자성아이고 자성청정이니 극락세계다. 圓成圓明 常樂玄通 원성원명이니 상락현통하니極樂世界 常生常用극락세계의 상생상용이로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성(圓成)세계다. 생겼다 사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 괴공이 없다 그거죠. 무너지고 없어지는 괴공이 없이 원성인데, 원만히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을 무량수라고 한다 이거에요, 무량수. 한량없는 수명. 원성, 무량수. 원성이란 말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통용된 말이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제일 크게 말한 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있는데, 노자 도덕경에, 큰 그릇은 만성이라, 근데 그것들을 유교식으로 새겨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그건 잘 못 새긴 거예요. 큰 그릇은 이루어진 모습이 안 보인다는 소리예요, 자연과 같이.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루어진 것이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다. 이루어진 게 안 보이는 게 만성이에요. 자연주의라, 자연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보이지 않거든요. 만든 게 보이는 건 사라져요. 만든 게 안 보이는 건 안 사라져. 이루어진 것이 안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큰 그릇이다. 이걸 노자라는 사람이 불교 들어오기 전에 얘길 했어요. 불교는 그릇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원성이에요. 원만히 이루어져서 수명이 끝이 없다, 원성. 또 원명(圓明)이라, 광명이 끝이 없다. 원성원명. 근데 인간이 태어나면서 햇빛광명도 보고 달빛광명도 보지만은 이 원명광명은 못 보거든요. 그런데 이 무량광을 떡하니 깨닫고 나면 일체 광명이 원명광명이다고 해요, 원광이다. 그래서 어떤 큰스님한테 가서 물었어요. “이 세상에는 일광이 있고, 월광이 있고, 성광이 있고, 등광이 있는데, 햇빛, 달빛, 별빛, 등불빛이 있는데 도대체 이 원명원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가서 물으니까, “일월성등광명이 모두가 원명원광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이것이 깨달은 사람하고 못 깨달은 사람의 차이점인데,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게 다 깨달음이에요. 일체가 극락세계에요. 햇빛도 원광원명이요, 달빛도 원광원명이요, 별빛, 등불 빛이 다 원광원명이다. 그러니까 생각으로 분별을 하면 햇빛이라고만 알지 무량광이란 걸 몰라요. 그래서 그걸 불교학회에 가면 깨달음과 못 깨달음의 차이점이 뭐냐는 걸 학술적으로 토론을 하는데, 깨달은 사람은 저 햇빛이 무량광이란 걸 알고 햇빛을 보고, 못 깨달은 사람은 무량광이란 걸 모르고 그냥 햇빛으로만 알고 햇빛을 보는 거다. 겨우 여기까지 토론을 해요. 그걸 어떤 수학자는 뭐라고 설명했냐 하면 ‘못 깨달은 사람은 0도에 머물러 있는 거고, 깨달은 사람은 360도에 머물러 있는 거다.’해서, 깨닫고 못 깨닫고의 차이는 0도와 360도 차이다. 재밌는 말이에요. 근데 문제는 0도가 뭐고 360도가 뭔지는 조견(照見)을 해야 보여요. 딱 비춰보면 보여요. 생각으로는 안 보인다. 그래서 원성원명이요, 상락(常樂)이요, 현통(玄通), 통함이 없이 다 통한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할 때 검을 현자와 통할 통자인데, 다 통해요. 상락현통이라. 원성원명 상락현통 극락세계의 상생상용이다(極樂世界 常生常用), 항상 하는 것이다. 항상 하는 것이고 항상 쓰는 것이다. 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원아림욕명종시 진여일절제장애面見彼佛阿彌陀 即得往生安樂剎 (普賢行願品)면견피불아미타하야 즉득왕생안락찰하소서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만법에 자성자상을 보면 그게 여여실상 극락세계니, 면견아미타불(面見彼佛阿彌陀), 아미타불이 무량수, 무량광, 구족대지혜 아미타불인데, 바로 눈앞에서 아미타불을 보시고 즉득왕생안락찰(即得往生安樂剎)하소서, 안락찰에, 편안하고 즐거운 극락세계에 바로 왕생하십시오. 그런 법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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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기도] 1월 20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법문
종범스님 2021-01-20
다라니 독송하신다고 정진을 많이 하셨습니다. 한꺼번에 어떻게 그렇게 몇백 번씩 해요. 다라니 삼 편을 해도 ‘한 편만하지 왜 삼 편을 하나’ 이래 가지고 속으로 불만이 많았는데, 삼백 독, 열독.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참 대단들 하십니다. 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밀가지(密加持)인데, 밀가지, 비밀, 더할 가, 가질 지, 더 갖게 한다. 비밀은 구밀, 신밀, 의밀, 말이 비밀이라 진언이고, 또 몸으로 표시하는 비밀이 있고, 신밀, 생각으로 전하는 비밀이 있어서 의밀이라. 선밀가지(宣密加持) 신전윤택(身田潤澤), 관음시식에 밀가지를 선설해서 몸이 윤택하게 하고, 업의 불이 맑게 하고 각자 해탈하게 한다(업화청량(業火淸凉) 각구해탈(各求解脫)), 그런 말이 있고요. 욕구공양지주원(欲求供養之周圓) 수장가지지변화(須仗加持之變化), 공양을 올리는데 공양이 원만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가지의 변화를 모름지기 가져야 한다. 그래서 공양을 올릴 때나 시식을 할 때나 밀가지, 삼밀가지, 늘 하는 말씀이고요. 演此無量總持門 滅除群苦咸解脱 연차무량총지문 멸제군고함해탈 供養無量善知識 能於十方蒙佛記 공양무량선지식 능어시방몽불기 (華嚴大禮文, 39禮) (화엄대예문, 39예) 지금은 그 예식을 못 하는데. <화엄대예>라는 책이 있는데, <화엄대예>에 보면 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무량이고 총지(無量總持)다. 무량, 한량이 없다. 총지라, 모두라는 총자가 있고, 다 간직한다는 지자가 있어서 모든 걸 다 간직하는 게 그게 다라니고, 또 한량없이 많은 걸 포함하는 게 다라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그래서 무량총지문을 연설하시고, 펼치신 것은, 멸제군고함해탈(滅除群苦咸解脱)이라, 일체중생의 고통을 다 제거하고 모두 다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 무량총지 다라니문을 열으셨다, 이거죠. 그리고 그 다라니문을 독송하고 수지하고 그것을 간직하면 공양무량선지식(供養無量善知識)이요, 한량없는 선지식께 공양하는 것이 되고, 또 능어시방몽불기(能於十方蒙佛記)라, 시방세계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일이 된다. 이렇게 대예참에서 말씀을 하시고요. 보통 경전은 언설장구(言說章句)라고 그래요, 언설장구. 그런데 다라니는 신묘장구(神妙章句)라고 해요. 보통 경은 언설로 이루어진 문장과 글귀, 장구인데, 다라니는 신묘장구다. 신묘, 신비하고 미묘한 장구다. 그래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언설장구 일체경전. 이렇게 돼요. 그러면 언설장구든 신묘장구든 이런 것이 왜 필요하냐. 그거는 일체가 마음인데, 산이 있어도 마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산이다. 죽음이 있어도 마음이 뒤에까지 있다. 그래서 뭐가 있든지 간에 마음이 있고 나서 그것이 있다 그거죠. 뭐가 없어져도 다른 것이 다 없어진 다음에 마음이 뒤에까지 남아서 그 없어진 걸 안다. 그래서 마음은 거후래선(去後來先)이라. 갈 때는 뒤에 가고 올 때는 먼저 온다. 어디를 가봐도 거기에 마음이 벌써 있어요. 또 어느 곳을 가도 마음이 제일 뒤에 따라가. 거후래선이여. ①眞如實相 自性清淨心 진여실상 자성청정심②一切凡夫 緣慮意識心일체범부 연려의식심 ③諸佛菩薩 智光普觀心제불보살 지광보관심 그런데 이 마음을 제불보살천하선지식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일체중생이나 불보살이나 다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이 있더라는 거예요. 자성이 청정해, 자성이 청정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무구정광대다라니(無垢淨光大陀羅尼)라고해요, 자성청정심은. 아무런 더러운 것이 없는 무구, 정광, 청정한 광명인데, 거기에 없는 것이 없어요. 무진장 일체구족(無盡藏 一切具足). 그래서 일체중생에게 무구정광대다라니 자성청정심이 있다. 이걸 깨달았는데, 깨달았다, 발견을 했거든요. 어마어마한 발견이에요. 자성청정 무구정광대다라니 마음이 있다 이 말이여.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찾아서 거기에 머물면 제불보살이 돼요. 그래서 이걸 구경(究竟)으로 얻어서 구경에 머물면 그것을 지광보조심(智光普照心)이라고 해요, 지광보조. 지혜와 광명이 널리 비춘다. 이것이 제불심이에요. 그렇게 완전히 구경에는 머물지 못해도 부처님을 향해서 점점 가면 보관일체라고 해요. 너를 보, 볼 관(普觀). 널리 일체를 다 보는 경지에 올라가는 게 그게 보살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지광보관(智光普觀)인데, 지광이 보조하고, 지광이 널리 비추고, 또 보살의 마음은 보관일체라, 과거나 미래나 일체를 널리 보는 게 부처님은 비추고, 보살은 봐요. 그 차이예요. 그게 불보살의 마음이고, 일체 범부의 마음은 어떠냐. 범부의 마음은 연려의식심(緣慮意識心)이라고 그래요. 연려라는 것은 인연 연자, 생각 려자인데, 이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연려심이에요. 연이라는 것은 쫓아간다는 의미에요. 연, 연이라는 게 옷 꿰맬 연자인데, 옷이 두 조각, 세 조각을 한데 꿰매야 하는 거지 하나로 옷이 안 돼요. 그래서 둘 이상을 하나로 붙이는 걸 연이라고 해요. 그래서 중생의 마음은 항상 붙어. 나무를 보면 나무에 붙고, 사람을 보면 사람에 붙고, ‘아, 잘 생겼다,’, 남의 얼굴 잘생긴 거 보면 그거 어디에 쓸거여. 근데 그거 쫓아간다고. ‘참 이상하게 생겼다.’, 이상하게 생겼으면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게 전부 연려심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의식이라고 그래요. 생각 의, 알 식. 의식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판별해요, 식별한다고 인지식별이 의식이에요. 이게 범부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대상을 쫓아가고, 연려, 또 대상을 인지하고 식별하고. 이걸 가지고 살아요. 그러니까 중생은 자성청정심 무구정광대다라니가 있는데 그걸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맨날 보는 대로 쫓아가고 보는 대로 판단하다가 자기 생각에 빠져서 죽어요. 또 자기 생각에 빠져서 누가 오라 소리도 안 했는데 세상에 꾸역꾸역 나와요. 이게 참 중생노름이에요. 누가 세상에 나오랬나. 또 못 살겠다고 야단이에요. 누가 살랬나. 이게 전부 연려의식심으로 벌어지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불교는 이 <연려의식심이 허망하다>고 하는 걸 가르치는 가르침이고 <자성청정심이 위대하다>라는 가르침이 있어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이 위대하다>라는 걸 가르치는 게 수행공덕이에요. 또 이 <연려의식심이 허망하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유식교설(唯識敎說)이에요, 유식. 오직 연려의식심뿐이다. 유식이다, <오직 식별심뿐이다>라는 거죠. 근데 의식에는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현행식(現行識), 나타내서 항상 움직이는 게 현행이에요. 또 하나는 종자식(種子識)이에요. 나타나서 움직이면 그게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종자로 남아 씨앗이 돼요. 이걸 또 발견한 게 참 희한해요. 내가 뭘 경험을 하면 그게 종자로 남아요. 안 없어져요. 그래서 이 현행과 종자, 종현의식이라고 그러는데 종자와 현행의 의식이다. 이 두 가지여, 크게 나누면. 그런데 그 현행식으로는 안이비설신의 의식이라고 한다는 거죠. 육식. 전오식이라고 하면 안이비설신까지는 전오식인데, 제육식은 의식이라 한다 말예요. 그래서 이걸 전오식, 제육식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크게 보면 제육식이 전오식을 다 포함하고 있어요. 근데 이 의식이 우리 모든 생활을 지배해요. 그래서 이 의식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서 제육의식이 어떤 특징이 있냐. 5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제육식 오종별, 오종차별, 이걸 가지고 우리가 사는데요. 이게 얼마나 불안정한 건지 이걸 알면 자성청정심을 깨달을 생각을 안 일으킬 수가 없어요. 第六識 有五種別 제육식 유오종별①明了意識(與前五識 同緣五塵) 명요의식(여전오식 동연오진)②散位意識(終受所引色 緣空華兎角 過未等) 산위의식(종수소인색 연공화토각 과미등)③定中意識(緣定中境 境有理事) 정중의식(연정중경 경유이사)④夢中意識(緣夢中境) 몽중의식(연몽중경)⑤散亂意識(緣散亂境 青見爲黃) 산란의식(연산란경 청견위황) (八識規矩頌釋文)(팔식규거송석문) 첫째 의식은 명요의식(明了意識)이라고 해서, 밝을 명, 알 요, 수료한다는 요자, 명요예요. 명요는 뭐냐. 눈으로 보면 보는 걸 분명히 알아. 보는 건 눈인데 아는 건 식이에요. 그래서 눈동자를 근이라고 그러고, 아는 걸 식이라고 그래요. 보통은 근과 식을 구별을 잘 못 해요. 사람이 숨이 지면 근은 남아 있는데 식은 작동을 못 해요. 죽은 사람도 눈은 그대로 있어요. 가까이 가서 봐도 못 봐요. 눈동자가 없어서 못 보는 게 아니라 안에 안식이 작동을 안 해서 그런 거거든요. 근과 식이 있는데 명요라는 것은 안근이 딱 어디의 뭐를 볼 때 안식이 발동을 해서 거기 역시 의식도 똑같이 그걸 알아요. 항상 전오식하고 같이 움직여. 그래서 전혀 조작도 없고 딴 생각도 없이 바로 아는 걸 명요의식이라고 해요. 귀가 딱 들으면 귀 듣는 소리를 귀의 의식도 똑같이 육식도 알아요. 이렇게 안이비설신이 똑같이. 오근에 따라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오근의식과 똑같이 육식이 아무런 조작 없이 안다. 이게 명요의식이거든요. 이건 아주 좋은 거예요. 근데 두 번째는 네 가지가 의식이 제멋대로 아는 게 있어요. 한 가지는 눈하고 똑같이 알고, 귀하고 똑같이 알고, 몸하고 똑같이 알고 이건 명요의식인데, 이거 말고 네 가지는 저 혼자 알아. 이게 아주 중생은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저 혼자 알아. 저 혼자 어떻게 아냐. 첫 번째는 흩어질 산자, 위치라는 위자, 산위의식(散位意識)이 있는데, 그럼 산위의식이 뭐냐. 무슨 물건을 보되, 감수적으로 보는데 그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저게 좋은 거냐 나쁜 거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거냐 이렇게 자기 감수적으로 봐요. 그러면 그 장소에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이 책상이라면 책상하고는 이미 흩어져 나간 거예요. 이거 자체를 안 보고 이게 좋으냐 나쁘냐 이걸 본다 말이에요. 이게 의식이에요. 그리고 없는 걸 있는 걸로 봐요. 그게 뭐냐 하면 허공에서 꽃을 본다든지 토끼에서 뿔을 본다든지, 토끼는 귀밖에 없거든. 근데 이런 걸 보고. 또 과거는 없는 건데 과거를 보고 앉았어, 이 놈이. 또 미래는 없는 건데 미래를 봐요. 이런 걸 산위의식이라고 해요. 위치에서 분산되어 저 홀로 식별하고 앉았다. 세 번째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인데, 선정이란 정자, 가운데 중자, 정이란 그친다는 말이에요. 의식이 식별작용을 딱 그쳐서 보면 두 가지를 알 수 있어요. 세상 사물을 깊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걸 선정인지라고 해서 선정에 들어서 전생을, 일생을, 이생을 봤다, 삼생을 봤다, 석가모니가 바로 깨닫기 전에는 수백 생까지 봤다고 하거든. 이게 정중의식이에요. 그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치를 볼 수 있어요. 이 세상에 사물로 드러나지 않으면 진여본질, 원천본질, 생각이 미칠 수 없는 원천적인 본질을 이와 사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이사(理事)라고 하거든요. 사는 형상으로 나타난 거고, 이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진실로 남아 있는 게 이인데 이도 볼 수 있어요. 이걸 정중의식이라고 해요. 정중, 마음이 딱 그쳐진 상태로는 이치도 보고 사물도 보고, 쉽게 말하면 공도 보고 색도 본다. 없는 것까지 없다 이렇게만 말했지, 없는 것까지 없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정에 들어야 알 수 있어요. 정중의식에 도달하지 않고는 몰라요, 없는 것까지 없는 상태를. 그다음 몽중의식(夢中意識)이 있어요. 꿈속에서 보는 게 있어요. 이게 의식이 하는 짓이에요. 꿈이 없는 거예요. 근데 꿈에 분명히 봤거든. 근데 꿈에 본 거 찾아보려면 없어. 이게 의식이고요. 그다음엔 산란의식(散亂意識)인데, 산란은 뭐냐. 푸른 것을 가지고 누르다고 그러고, 나무인데 사람이라고 하고, 엉뚱하게 보는 거예요. 치매에 걸리면 이게 강해지는 거예요. 치매가 오면 그 특징이 모든 걸 무서운 존재로 봐요. 그래서 피하는 게 많고 도망가는 게 많고 겁이 많아. 겁이 많으니까 힘을 쓰는 게 굉장히 강해요. 산란의식 때문에 그래요. 없는 데서 있는 걸 보고, 작은 데서 큰 것을 보고, 전혀 엉뚱하게 보고. 옛날에는 이걸 노망이라고 그랬는데, 노망의 노는 쇠약하다는 의미거든. 이게 근이 쇠약해지면 의식이 산란해진다 이 소리예요. 근은 몸인데, 몸이 쇠약해지면 의식이 산란해져요. 뭐 이상하게 보는 거여. 이게 의식이에요. 의식을 설명할 때 첫째는 명요의식, 둘째는 산위의식, 셋째는 정중의식, 넷째는 몽중의식, 마지막은 산란의식, 이렇게 다섯 가지가 차별이 있다. 이걸 처음에 알아내는데 얼마나 깊이 관찰했겠어요. 이런 정도니까 이걸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자. 그럼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면 어떤 결과가 오냐. 지혜의 보답을 얻어요. 지혜광명을 얻어. 지혜광명을 얻으려면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보답이 깨달은 지혜, 각지광명(覺智光明)이다. 각지, 깨달은 지혜광명이다 그거죠. 그리고 지혜가 생겨나면 넓게 볼 수 있어요. 일체를 보관한다. 이 몸이 천년 후에 어떻게 돼 있을까. 이것을 보고 나면요, 지금 산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천년 후의 내 모습을 한번 보자 이거에요. 천년 전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을까. 또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다 본다. 생각은 하는데 온 우주를 다 본다. 이것은 의식을 멈출 때 보이거든요. 그러면 이 몸이 머물러 있는다는 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 깨달음이 필요하고, 깨달음은 자성청정심을 얻는다는 거죠, 다시. 회복하는 거예요. 회복하면 지혜가 생기는 게 필요하다. 冷水止湯沸 漸抽釜底薪 냉수지탕비 점추부저신還成原泉水 潤雨大地春환성원천수 윤우대지춘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것이 두 가지 방법인데, 크게 나누면,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서 지혜로 차지하는 방법이 깨달음이고 수행인데, 수행은 딱 2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염불, 주력과 같은 건데, 염불, 주력이라는 것은 비유로 말하면 치문에 보면 망명법사식심명(亡名法師息心銘)이라는 게 있는데, 주해에도 나온 얘긴데, 마음속의 의식의 불길이, 번뇌라고 그러는데, 의식이 자꾸 밖으로 가니까 그걸 불에다가 비유한 거예요. 의식의 불길이 막 솟아올라 오는데 물이, 큰 가마솥에 물이 한솥 있다. 그 밑에 장작불이 활활 타서 막 물이 끓는다. 그러면 번뇌가 막 일어나는 거고, 세상을 향해서 욕심으로 업을 짓는 것을 물 끓는 걸로 비유했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첫째는 냉수로 지탕비(冷水止湯沸)라, 끓을 탕자가 있고 끓을 비자가 있는데, 차디찬 물을 가지고 거기다가 부어서 끓는 물결을 그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주력이라는 거예요. 그 펄펄 끓는데도 물 한 동이를, 찬물 한 동이를 갖다가 부으면 잠시 멈추거든. 염불을 떡 하면 잠시 멈춰요, 번뇌의 불길이. 다라니 한편을 떡 외우면 그 활활 타는 불길이 멈춰. 그 왜 위험한 짓을 저렇게 하나. 그런 소리를 하면 너무 시정 없는 거예요. 안 할 수 없는 번뇌의 불길이 타오르는데 어떻게 안 해요. ‘술 좀 그만 먹어라.’ 그 시정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술 먹고 싶은 욕구의 불길이 막 타오르는데 어떻게 안 먹냐고. 기가 막힌 소리여. 이런 의식이라든지 이런 걸 공부하면요, ‘뭘 하지 마라.’고 할 수가 없어요. 안 할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른다 이거여. 그러면 그 불길을 어떡해야 하냐. 경을 읽는다든지, 다라니를 외운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그러면 이게 독경, 염불, 주력, 송주(誦呪)라고도 하고, 다라니의 힘이라고 주력과 마찬가지인데, 이게 끓는 물에다가 찬물 부어서 잠시 멈추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경을 본다든지 선정을 수련한다든지 이런 것은 가마솥 밑에 나무를 빼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물이 막 솟아오르니까 그것을 빼내 봤댔자 금방 또 솟아오르는 게 그치지 않아요, 타는 기운이 있어서. 그래서 위로는 찬물 부어서 끓는 물길을 멈추게 하고, 아래로는 장작을 빼내서 뜨거운 기운을 없애게 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인 거예요. 경도 독경이 있고 간경이 있는데, 간경은 선정이나 똑같은 거고, 독경은 염불이나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경을 소리 내서 계속 읽는 건 염불하고 송주하는 것과 똑같은 거고, 경을 딱 보는 것은 견불간경(見佛看經)이라고 경을 깊게 보면 부처님을 볼 수가 있어요. 이게 간경견불이다.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냉수지탕비하고, 냉수로는 탕비를 그치게 하고, 점추, 점점 뺀다, 뺄 추자, 부저신(漸抽釜底薪) 이라, 가마솥밑에 나무를, 나무 신자가 있거든요, 뽑아내요. 그러면 물이 처음에는 막 열탕수가 됐는데, 그 사람 다음에는 나무도 없고 냉수도 부으면 점점 원천수로 돌아가요(還成原泉水). 원, 수원지, 샘, 물, 원래 샘에 있던 물이 돼버리는 거예요. 이게 무구정광대다라니 자성청정심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 물을 가지고는 윤우(潤雨)가, 윤택한 비가 돼서 대지춘(大地春)이라, 대지가 다 봄을 이루게 한다. 그게 대자대비인 거예요. 그래서 물도 원천수가 있고 열탕수가 있고 윤택한 봄비가 있고 이런 거지. 깨달은 거를 윤택한 봄비로 설명을 하고, 번뇌에 막 찌들어있는 중생의 연려의식을 열탕수에다 비교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떡 보면 범부는 누굴 위한다고 하는 게 진정하게 위할 수가 없어요. 자기 번뇌가 있기 때문에. 위한다고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위해 살겠다.’ 그 말 잘못 들었다가는 그 사람 때문에 평생 고통당해요. 절대 위한다는 말 듣고 따라가지 말아요. 왜 그러냐 하면 열탕수를 가지고 풀이나 나무에 부으면 말라 죽어요. 내 번뇌불이 꺼진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지, 내 번뇌불이 활활 타오르는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요. 내 번뇌불이 그 사람을 죽게 만들어. 석가모니가 왜 담을 뛰어넘어서 도망갔겠어요. 자기 아버지한테 욕심이 있다 말이지. 그 말 들으면 자기도 욕심의 불에 타 죽는거라. ‘아, 이 아버지 말은 절대 들으면 안 된다.’ 아무리 지금 나무가 물이 필요하더라도 끓는 물을 가져다 부어보라고요, 어떻게 되냐고. 자기가 먼저 편안한 청정지혜심이 돼야 진정하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돼서 대자대비도중생, 대자대비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거예요. 번뇌열화고중생, 중생을 괴롭혀.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면 괴롭혀요. 若欲成就佛所說 菩薩廣大殊勝行 약욕성취불소설 보살광대수승행宜應善住此迴向 是諸佛子號普賢 의응선주차회향 시제불자호보현(十廻向品, 33)(십회향품, 33)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주욱 하고 마음을 잘 살피고,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을 가마솥에 나무를 빼내는 것과 같고, 기도를 하는 것은 뜨거운 물에 찬물을 부어서 물을 식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범부의 세계에서 제불보살의 세계로 가요. 갈 때는 어떻게 가느냐. 범부 연려의식으로 사니까 지광보관의 세계로 가야 연려의식이 수정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 부처님께 귀의하는 걸로 시작하는데, 귀의하는 첫 번째 행위를 공양할 공자, 부처 불자, 공불(供佛)이라고 해요. 그거는 연려의식 번뇌를 지혜로 바꾸는 첫 출발이에요. 공불로 시작을 해요. 그다음에는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예불, 처음에는 물질로 부처님께 돌아가고, 그다음에 몸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다음에는 염불이에요. 공불, 예불, 염불. 항상 불보살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공덕을 그쪽으로 돌이켜서 회향을 해요. 그리되면 공불, 예불, 염불이 점점 깊어지면 견불할 때가 와요. 부처님을 볼 때가 와요. 그걸 십지보살(十地菩薩)이라고 해요. 견불. 십지보살되면 견불을 해요, 부처님을 봐. 그럼 견불한다면 어떻게 되냐. 점점 더 깊이 봐서 나중엔 주불(住佛)을 해요, 머물 주자, 부처 불자. 부처세계에 머물러. 그게 성불이에요. 그러면 부처세계에 머물면 뭐냐. 그게 지광보조인데, 지혜광명으로 널리 비추는 행불(行佛)뿐이에요. 그냥 불의 세계를 실행하는 거 뿐이에요. 성불은 바로 행불이고, 성불은 주불이다. ‘성불하십시오.’라고 하잖아요. 성불이 바로 그거에요. 성불이란 것은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거고, 일체지혜를 이루는 거고, 또 대자대비를 실행하는 게 성불이에요. 청정성불, 지혜성불, 자비성불. 저절로 하나 되면 다 되는 거예요, 그게. 다라니 독송은 천독밖에 안 했는데 법문은 성불까지 이렇게 떡 하고.(웃음) 가는 길이 이런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니까 마음이 아주 열이 받칠 때는 다라니 한 편만 딱 읽어도 끓는 가마솥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것과 같아서 우선 진정이 돼요. 진정이 되면 내가 내 마음을 살피게 돼요. 이렇게 하는 사람을 보현이라고 그런다. 보현. 그래서 공불을 하는 것도 보현이고, 예불을 해도 보현이고, 염불을 해도 보현이고. 견불도 보현이고, 성불도 보현이고. 그런데 이걸, 보현행을 주욱 하는데는 출행(出行)보현인데, 날 출자, 갈 행자, 나아가는 보현이 있어요. 나아가는 보현은 뭐냐 하면, 그 번뇌의 속박에서 탈출해, 그걸 출행보현이라고 해요. 그러면 그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 처음에 신심을 내서 공부를 할 때부터 십지 제일 마지막까지가 다 탈출하는 보현이여. 번뇌가 하나도 없이 다 탈출해버려. 그래서 해탈이라고 그러잖아, 해탈. 해탈은 모든 번뇌속박에서 탈출한다는 소리예요, 탈출. 그다음에 깨달음이라고 그러는데요. 다 탈출하고 보면 그 탈출한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완전히 나와보니까 나온 거나 안 나온 거나 다르지 않더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십지 후에 등각(等覺)이라고 해요. 등각은 속박이나 해탈이나 같다. 완전히 청정수가 되고 보니까 끓는 물이나 차가운 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말이죠. 그래서 십지보살 이후에는 ‘내가 내생에는 저 산 아래에 가서 한 마리 소가 되겠다.’ 이게 등각의 경지인 거예요. ‘내가 내생에 저 산의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겠다.’ 되고 싶은 대로 다 되는 거예요. 이걸 입행(入行)보살이라고 해요, 들어갈 입자, 행할 행자. 입행보현, 출행보현. 뭐든지 다 되는데 뭐든지 다 갈등이 없는 거, 이게 진짜 정신세계가 높은 거예요. 거기에 무슨 자존감이나 열등감이나, 파괴감, 박탈감 전혀 없어요. 출행보현이 되면 나중에는 입행보현이 된다. 부처님 경우에 보면 누가 아무리 욕설을 해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거는 입행보현이 되어서 그래요. 출행보현에 머물면 번뇌를 멀리해야 하는데 번뇌가 자꾸 끼어들면 싫어. 조금이라도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해서 고함을 크게 내면 아직까지 저 사람은 출행보현이다. 벗어나려고 하는 보살이구나. 어디 가서 씨름도 하고 거리낌이 없으면 저 사람은 입행보현이다. 어느 집에 가서 소도 되고 말도 되고 닭도 되고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같다 이거예요. 더 들어가면 변행보현(遍行普賢)인데, 두루할 변자, 변행삼매라고, 변행삼매가 지광보조거든요. 지혜광명이 널리 비추고. 하고 안 하고 전혀 구분이 없어요. 변행삼매에 들면. 그게 묘각(妙覺)이라고 해요. 등각에서 묘각.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다라니 천독한 게 숫자가 천밖에 안 되지만, 불교는 총지 원융(摠持 圓融) 을 말한다고요. 전체를 다 가지고 있다, 원융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 열과 십이 있는데, 십은 모든 것인데 하나 없는 열이 없다. 열 속엔 하나가 있다 이거지. 열 없는 하나도 없고, 하나 없는 열도 없고. 이걸 원융이라고 해요, 원융. 하나 하나 하나 이렇게 가는 것을 차제(次第)라고 그러고. 하나와 전체가 함께 있다는 걸 원융이라고 그런다고. 그러면 다라니 천독을 했다. 나중에 성불 떡 하고 보면 이것도 열 속에 하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은 몰라요. 하나만 볼 때는 열을 못 봐. 또 열만 볼 때는 하나를 못 봐. 그런데 반드시 전체 속에는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는 전체가 있다 말이죠. 아무리 북한산이 커도 그건 작은 먼지로 이루어졌거든. 그런데 북한산 전체를 볼 때는 먼지가 안 보여. 또 먼지를 볼 땐 북한산이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안 보여도 다 있는 거예요. 먼지에도 산이 있고, 산에도 먼지가 있고. 그러니까 한번 한 거, 두 번 한 거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이것이 업장으로부터 해탈하는 일이고, 해탈, 성불하는 일이다. 성불은 지혜를 이루는 거고, 해탈은 번뇌에서 벗어나는 일인데, 해탈은 소극적 표현이고 성불은 적극적 표현이에요. 성불 그러면 지혜를 이룬다 이 소리여. 지혜 못 이룬 부처님은 하나도 없거든. 그러니까 절 한번 하는 것도 해탈하고 성불하는 일이고, 다라니 한 번 외우는 것도 해탈하고 성불하는 일이고. 그게 하나가 하나가 아니고 전체가 된다. 이런 신심과 이런 생각을 항상 가지는 게 중요해요.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CMiGG5rrPAI 에서 법문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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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기도] 12월 21일 동지기도 주지스님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0-12-21
-팥죽 나누며 이웃 위한 나눔 실천하는 날- 안녕하세요. 오늘도 비대면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시청자들과 진관사 신도님들께 법문을 해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지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동짓날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초파일 다음으로 신도들이 굉장히 많은 날이었는데, 이렇게 코로나19로 인해서 비대면을 하다 보니까 신도님들도 구독하는, 시청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동짓날은요, 밤이 제일 길고, 긴 긴 밤이라고 하죠.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새 책력 반포하니 절후는 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11월 <농가월령가>- 사실은 동지 기도는요, 새 희망을 기원하면서 코로나를 물리쳐야 되는, 종식시켜야 되는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과 밖이 삿된 기운을 막고서 양의 기운을 맞아들이는 절기가 동지입니다. 보통 음기가 가득할 때는 양기의 팥을 뿌려서 삿된 기운을 막는데요. 우리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하고, 일 년에 4번이나 되는 설을 맞습니다. 동지가 그 첫째, 절기의 22번째, 소한, 대한 끝나면 24절기가 마치고, 또 24절기가 시작하는 입춘도 새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음양의 새해가 있습니다. 양의 정월은 양력 1월 1일이고, 음의 정월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를 새해라고 하는데, 이렇게 4번이나 되는 새해를 맞이합니다. 오늘 동지는 음력 초이렛날이에요. 음력으로 초하루부터 열흘까지를 애동지라고 그러고, 열하루부터 스무날까지를 중동지라고 그러고, 스무하루부터 마지막 그믐까지를 노동지라고 해요. 애동지는 아기들이 불편하고 좋지 않다고 해서 동지팥죽을 안 쑤지만, 저희들은 이웃과 함께 공덕의 음식, 베풂의 음식, 나눔의 음식을 해서 팥죽을 굉장히 많이 쒀서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오신 분들은 가져 가실거고, 저희들이 그동안 참 많이 베풀고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팥죽이란 시에 보면, 두죽(豆粥)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두탕(豆湯)이라고 해서 수륙재 때 두탕을 올립니다. 팥죽을 올리는데요. 우리가 팥죽이라고 할 때는 한글로 팥죽이고, 한문으로는 두죽 또는 두탕이에요. 李應禧(이응희)가 지은 “옥담유고”에서 보면, 팥죽(豆粥) 復月霜雪至(복월상설지)니 동짓달에 서리 눈이 내리니 田家寒事畢(전가한사필)요 농가에는 월동준비를 마쳤다. 瓦釜明豆粥(와부명두죽)라 오지솥에는 팥죽 끓는 소리 (우리는 큰 솥에 몇 말씩 되는 팥죽을 쒔거든요.) 食之甘如蜜(식지감여밀)이라 먹으니 그 맛이 꿀처럼 달구나. (사실은 달지는 않지만 맛있다는 표현을 달다고 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집에 가셔서 시식하면서 같이 함께 드시진 못하지만, 팥죽의 의미를 새겨보시고, ‘올해 팥죽 한 그릇 먹었으니 새해가 시작되었구나.’라는 느낌도 들고요. 옛날에는 나이 숫자대로 팥죽의 옹심이를 먹는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80세 되신 분이 80알 먹으면 큰일이 나죠. 그럴 때는 십진법으로 열 살에 1개씩만 먹으면 8알만 먹으면 됩니다. 70대시면 7알 먹으면 되고. 옹심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엄청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분들은 또 팥죽을 안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데 보통 우리들의 음기를 보해서 양기를 북돋우는 그런 음식도 되고, 약간 찬기가 있기 때문에 찹쌀로써 상호보완을 해줍니다. 동지의 유래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주역경의 복괘(復卦)를 11월, 즉 자월(子月)이라 해서-우리가 십이지할 때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고 하지요. 11월을 자월이라고 해서 동짓달이라고 해요. 그렇지만 십간 할때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라고 해요.- 동짓달부터 시작한 것도 동지와 부활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지를 陽始生之日(양시생지일, 양의 기운이 비로소 시작되는 날)이며 다음 해가 시작되는 날, 아세(亞歲)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작은 설이라고도 해요. 동짓날 팥죽을 먹는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해지는 말이 있는데, 사실 신라시대 때부터 그렇게 먹었고요, 고려시대 때도 가족이, 밖에 나간 가족들이 다 모여서 팥죽을 쑤어, 색동저고리 같은 채색이 된 옷을 입고서 같이 나누어 먹고, 어른들에게 술을 드리면서 수명장수를 발원하고 가족의 화합을 나눴다고 해요. 몇가지 전하는 전설이 있는데,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 共工氏 )의 재주 없는 아들이 말썽만 잘 피워요. 그런데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절집에서 점안식이라든지, 큰 행사를 할 때, 나쁜 기운이 올 때 팥을 뿌려요. 팥을 뿌리고, 소금, 막걸리 등등해서, 삿된 기운을 벽사해주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팥죽을 쑤어서 벽에 뿌렸던 기록이 있어요. 한국의 동지 풍속은 신라시대 선덕여왕과 지귀의 이야기에도 들어있어요. 선덕여왕이 황룡사에서 예불을 드리는데, 지귀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해서 빨리 만나고 싶은 생각에, 예불 끝나고 만나자고 선덕여왕이 사람을 시켜 얘기했으나, 예불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어요. 죽은 지귀가 남의 집과 재산을 태우는 악귀가 되었고, 사람들은 팥죽을 쑤어 액땜을 한다고 해서 악귀를 쫓았다고 해요. 벽사(辟邪)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선(禪)의 세계를 알리기 위한 설화도 있어요. 중국 무착 선사가 오대산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정진하였으나 마음에 집착함이 남아있어-무착의 반대말이 뭔지 아시죠. 집착이죠. 세상에 집착이 없으면 자유로운데, 집착 때문에 병이에요. 무착 선사는 그런 의미의 집착은 아니지만,- 아직도 마음에 문수보살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문수보살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겠음을 한탄하였다고 해요. 이후 앙산선사의 문하에서 정진하고 있었어요. 어느 동짓날 무착 선사가 팥죽을 쑤면서 주걱으로 젓고 있는데, 홀연히 가마솥 팥죽 위에 문수보살이 나타난 거예요. 무착은 팥죽을 쑤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후려갈겨 버렸어요. 이에 놀란 문수보살이 “무착! 나 문수일세.” 라고 거듭 말하였으나 무착은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일 뿐이다(너는 너고 나는 나지).” 라고 하였어요. 그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이를 통해 무착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선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는 일화예요. 또 나한전의 나한님의 입술이 좀 빨갛지요. 부산의 마하사에 관계된 것입니다. 동짓날 아침, 마하사의 공양주 보살은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어요. 늦잠을 잔 바람에 아궁이 불씨마저 다 사그라지고 불씨를 얻으러 밑에 내려가야 되는데 늦게 갔어요. 이때 절 아래 동네에 사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아까 동자가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서 공양주 보살은 부리나케 절로 돌아왔어요. 왔더니 팥죽이 다 쒀져 있고, 나한님께 마지 올리려 가니 나한님의 입에 붉은 팥죽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도 있고,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쨌든 팥죽의 의미는 우리들이 1년 동안 무탈하고 원화소복(遠禍召福), 화는 멀리 가고 복을 비는 의미도 돼요. 동지 기도를 맞이하여 새해에는 어떤 바람을 해야 되겠느냐. 첫째, 부처님을 뵙는 기쁨 둘째, 법을 듣는 기쁨셋째, 보시하고 후회하지 않는 기쁨 넷째, 온갖 중생에게 안락을 주는 기쁨이 네 가지 기쁨이 항상 충만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재앙소멸이 모두 사라지길 발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짓달 동짓날 동지팥죽 드시고 원화소복하셔야 되는데,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든 삶이 어려울 때 드시면서 건강하고, 면역력을 키우고 1년동안 무탈하기를 발원합니다. 혹시 박복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낼 수가 있어요. ‘나는 왜 이리 복이 없나?’ 복을 지은 바가 없기 때문에 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채근담에 보면,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준다면나는 내 덕을 두텁게 쌓아 이를 맞이하고(나를 박복하게 만들더라도 복을 지어 복을 두텁게 하면 되고) 하늘이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면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이를 보충하고(‘다른 사람은 편한데 왜 나는 고통스럽나’라는 마음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을 내지 마시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아무리 나에게 고통을 줘도 나는 편안하게 해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내면 편안한 거예요. 그렇듯이 괴롭다는 생각을 내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을 내시고.)하늘이 내 경우를 곤란하게 한다면(나를 곤란하게 해서 시험의 대상이 되게 할 수도 있지요. 혹시 우리가 잘 나가다 가도 아래로 끌어내려져서 괴로움이 닥쳤을 때 그걸 역으로 돌려서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내어 가지고)나는 내 도를 깨우쳐 이를 통하게 할 것이다그러니 하늘인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하늘이 아무리 나를 박복하게 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수고롭게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팥죽만 드실 것이 아니라 팥죽을 먹는 의미도 생각해 보시고, 팥죽은 벽사의 의미도 있고 화를 없애고 복을 불러주는 의미도 되니까 이웃과 더불어 함께 공덕을 베풀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면 하시는 대로 세상은 편안해 질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팥죽을 많이 드시면서 면역력을 키우시면서 모든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또 함께 더불어서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야 되겠지요. 발원은 내가 하는 거예요. 남이 해주는 게 아니에요. 기도도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나 스스로, 하늘은 스스로 하는 자를 돕는 거예요. 억지로 안 하려는 걸 역행해서 하는 역행보살(逆行菩薩)보다도 순행을 하면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잘해줘야 되겠다, 이런 마음 내면 세계가 평화롭고 아름답고 아주 행복해집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행복을 느끼면 행복은 느끼는 자의 몫입니다. 우리도 이웃과 더불어 함께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고 편안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심축해서 다같이 행복하도록 기도해봅시다. 감사합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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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음력 11월 신중기도 입재 주지스님 법문
주지스님 2020-12-15
안녕하세요. 오늘도 이렇게 비대면으로 진관사 TV 구독자들과 신도님들과 함께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1월인가 했더니 벌써 12월이 다 됐습니다. 날씨가 엄청 추워졌지요.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만나고 싶고 또 뵙고 싶었는데, 점점 날씨가 춥다 보니까 무증상자들이 나타나서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집에서 열심히 저희들과 함께 기도하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항상 평화와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기도가 아닌가 싶고요. 또 우리들의 과거 업장 소멸을 해주는 백신이 바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점점 깊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상한 가운데 무상하지 않고, 또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고, 소멸하는 가운데 소멸하지 않고, 늙어가는데 늙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여여한 이 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말하는 불성 자체, 자성이면서, 청정심이면서, 일심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마음을 굳게 지키면서 기도 열심히 해보도록 합시다. 오늘은 편양언기선사, 서산대사로부터, 사명대사로부터 전해받은 편양언기선사가 어떤 말씀을 하셨나 한 번 보세요. 霜落千峯草木愁(상락천봉초목수)요 世間何處不悠悠(세간하처불유유)라 君知身老非心老(군지신로비심노)하니 萬古乾坤月一秋(만고건곤월일추)로다 서리치는 천 봉우리 나뭇잎 마르나니(지금 모든 게 다 마르잖아요. 그리고 굉장히 춥죠.) 이 세상 어디인들 쓸쓸하지 않으리.몸은 늙어가도 마음은 안 늙나니(우리들의 본성자체, 유유자적한 일심 자체, 청정심 자체, 그 자체는 변하지도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만고의 하늘과 땅, 달빛은 가을이네. -편양언기선사(鞭羊彦機, 1581~1644)- 정말 무상하면서도 무상한 것을 느끼지 않고 여여하게 기도 정진하면은 그것이 우리들의 일과가 아닌가. 지금 한창 선방에서는 정진 중입니다, 동안거로서. 그렇지만 진관사에서는 여러 가지 신구의 삼업으로 정진하고 기도로 정진하고 또 일과로서 독경으로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시를 한번 보죠. 김장 시 처음 보셨죠. 권근이라는 분이 계셔요. 우리 진관사 수륙재 조성기를 지으신 분이 누군지 아세요? 권근입니다. 양촌집 12권에 있는데요. 고려말 조선 초기의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 집의 종손들이 진관사에 다니는데 그분들이 권혁홍씨 가족들이에요. 권근이 10월이 되다 보니까 김장을 하면서 시를 한 수 읊었습니다. “김장 蓄菜(축채)” 十月風篙肅曉霜 (시월풍고숙효상)이요園中蔬菜盡收藏 (원중소채진수장)이라須將旨蓄禦冬乏 (수장지축어동핍)하니未有珍羞供日嘗 (미유진수공일상)이오寒事自憐牢落甚 (한사자련뇌락심)이니殘年偏覺感懷長 (잔년편각감회장)이라從今飮啄焉能久 (종금음탁언능구)하니 百歲光陰逝水忙 (백세광음서수망)이로다 -권근(權近 1352~1409)- 우리가 음식 중에서 김장은 반농사라고 합니다.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김장이 더 맛있다고 하는데, 이 발효음식이 우리들의 백신을 함께 도와주는 역할도 합니다. 요새는 일회용 등 여러 가지 음식이 있는데, 서양의 발효음식은 치즈, 우유, 포도주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발효음식은 된장, 고추장, 김장들이 다 발효음식입니다. 이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들이 아주 건강하고 평화롭고 아주 자유자재롭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월이라 바람세고 새벽서리 매서워져울 안팎의 온갖 채소 다 거둬들여 놓네김장을 맛나게 담가 겨울나기 대비해야 되네(일년농사라고 합니다. 김장을 잘 담궈야 1년내내 음식이 맛갈납니다. 반찬 못 하는 사람이 양념만 많이 넣습니다. 그러니까 단백하면서도, 저희들은 오신채를 안 쓰지만 그 숙성하는 과정에 그 음식이 발효음식이 되어 우리 몸을 도와주는 역할도 합니다.)진수성찬 아니라도 하루 소찬을 대지.암만 봐도 겨우살이는 쓸쓸하기 짝이 없고 (아무리 좋다좋다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는데, 겨울은 쓸쓸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면서.) 늙은 뒤로는 유난스레 감회에 깊이 젖네.(자기가 죽 살다보니까 ‘늘그막에 감회에 젖네.’라고 말씀하신거예요. 우리도 살다보면, 벌써 60 이상 되면 저 멀리, 저 세상이 이세상 보다 가깝겠죠. 부지런히, 늙기 전에 열심히, 젊은 분은 정진하고, 늙으면 늙는 대로 거기에 맞춰 정진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먹고 마실 일 얼마나 남았으랴(얼마나 남았어요? 30대는 30-40년 남았겠고, 70대는 10-20년도 많을 거 같아요.) 한 백년 세월은 유수처럼 바쁜 것을.... 권근이 음력 十月 김장을 하고 나서 지은 내용입니다. 늦가을이 훌쩍 다가오자 채소를 거둬 겨울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지금은 인건비가 너무 비싸 몇 만 포기를 다 거둬들이지 못해, 밭에서 그대로 썩고 있다는 말이 가슴을 아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다 거둬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안 되니까요. 말리거나 절여서 겨울 내내 먹을 음식을 장만하고 보니 안도감과 함께 이제는 한해도 저물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김장은 어느 음식 장만과는 다르게 무게를 담은 듯합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인이 김장철에 느끼는 한 해가 다 갔다는 쓸쓸함(김장을 담그면 겨울임을 느낍니다), 그리고 김장을 마쳤을 때의 안도감등이 그대로 나타나 이 한시에 담긴 내용이 묵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왕삼매론 아시죠. 明나라 묘협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宝王三昧念佛直指) 中에 십대애행(十大碍行 10가지 장애) 을 살펴보면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마라.2. 세상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3.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4. 수행하는데 마장 없기를 바라지 마라.5. 일을 계획하는데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6. 친구를 사귀는데 내게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여 주기를 바라지 마라.8. 덕을 베풀면서 과보를 바라지 마라.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10. 억울함을 당해 굳이 분풀이를 하지 마라.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10가지 장애가 생기니까 이런 것을 잘 살펴서 수행하지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이 많은데 그걸 잘 이기면서, 친구 사귀는데도 도가 있고, 덕을 베풀면서 거기서 바라면 괜히 내가 이렇게 해서 못하면 어쩌나 괜히 마음이 좀 넘치죠. 너무 바라다보면 바람만큼 되지 않을 때, 모든 지 하려고 할 때,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된다는 거예요, 내가 했다 해도.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죠. 그렇듯이 해도 한 바 없고, 주어도 준 바 없는 그런 자취가 마치 허공에 나는 새가 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뭐를 하더라도 자취가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된다. 맨땅에 세운 기와집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대들보와 기와와 기둥이 무게가 평행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귀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하면 친한 만큼 다툼이 많기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된다는 내용도 있고요. 세상살이도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겸손을 잃고 경솔하여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벌써 연말입니다. 올 한해를 돌이켜 보면서, 내가 올해도 잘 살았는가, 아무 후회 없이 살았는가, 남에게 잘못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볼 기회도 됩니다. 자업자득이란 말이 있듯이 내가 지어서 내가 받고 내가 만들어서 법이, 나로부터 법이 이루어지고 나로부터 법이 멸했듯이 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라고 하는데, 내가 변화를 했는지 반성하면서 나를 짓누른 무거운 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그 짐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준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망, 한탄 등을 할 것이 아니라 항상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당신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되고 있습니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아무 거리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지인은 무기하고 신인은 무공하고, 성인은 무명(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사람은 자기에게 의지하지 않고 신인은 공로에 얽매이지 않고 성인은 명예를 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옛말에도 이렇듯이 살아가면서 누구 탓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무시겁래 나의 업장소멸을 하면서 나로부터 모든 것이 일어났으니까 내가 좀 관조하면서 남을 좀 살펴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있으면 동지입니다. 동지는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다고 합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이 노루꼬리 만큼 길어진다고 합니다. 지금은 5시 2-30분이면 깜깜합니다. 점점 어둠이 가면 밝음이 돌아옵니다. 밝음 지나면 어둠이 오고 어둠이 지나면 밝음이 오듯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희망도 조금 어쭙잖은 일이 있더라도 그걸 다시 돌이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지금 코로나 19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씁쓸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좀 반전시켜서 좋은 마음 내면서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고 함께 더불어 편안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법문마치겠습니다. 유튜브 <진관사TV>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k3_V0nlgcM